Political and economic contemplation on the fundamental problems of 2017 South Korean society


Introduction


모든 시장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 
예외는 없지만 걔중에 가장 비도덕적인 시장은 있다. 
이름하여 정치 시장. 
이 시장에는 가장 양심 불량의 상품들이 주로 팔린다.
고객의 눈속임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 상품들은 고객의 무지와 망각에 기대어 계속 팔려왔다.


Every market serves human happiness either directly or indirectly. 
There is no exception for this, but there is surely the most immoral market in the world. 
Its name is the Political Market. 
In this market, the most deceitful and immoral goods are successfully sold. 
These goods have been sold through the professional fraud of the sellers and consumers' ignorance and oblivion have always enabled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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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이래로 현대 국가의 정치 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상품 제조 철학은 사회주의이다. 
여기서 사회주의란 좁게는 마르크스 교조주의 뿐 아니라, 시장 경제의 자유주의 원칙에 대항하는 이념으로서의  (개인의 경제적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사회경제적 이념들을 총칭한다.
이들(예를 들어, liberal socialism)은 이론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말하는 시장 경제의 문제점의 근본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며, 그럼에도 시장 경제는 어쨋거나 문제가 있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그 자유로운 메카니즘을 제한해야 한다고 여긴다.   
보다 큰 문제는, 사회주의는 정치시장에서 그 사회주의 정치 상품을 구매한 구매자 개인들의 장기적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으며, 그 사회 전체 대중을 대상으로 감성적 차원의 이상 사회 수립 (혹은 지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부분 사회주의 이론들은 정치화된 학문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 영역에서 이러한 정지적 목적으로 수렴된다. 

        
                                                              
사회주의 정치 상품이든 기타 잡다한 보수 (정치철학이 대개 불분명한) 상품들이든 실제 정치시장에서의 판매전략은 집단주의에 현실적으로 의존한다. 

사회주의는 그 자체 이론적으로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의 도식적 구분에 기반하는) 집단주의적 유인 내지는 선동을 본질로 하므로 정치시장에서 무지한 (현실적으로 밥벌이로 무관심한) 대중의 감성에 잘 부합한다. 

영국의 대중도 대개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잘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경제학적 역사학적 고찰이 없다. 
19세기 후반까지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국가인 영국이 classic liberalism에서 확실히 liberal socialism으로 노선을 갈아탄 이래, 비슷한 인구 규모의 일본 경제(20세기 전반부의 대부분을 anti-socialism과 classic liberalism에 할애했던) 에 완전하게 추월 당하기까지는 100년도 걸리지 않았음에 무감각하다. 경제의 수준은 단지 숫자가 아니며, 근면, 신뢰, 책임 같은 사회적 자산의 덕목들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 

영국인들은 그들 사회의 지식인들 (대부분 친사회주의 학자들)이 설파하는 대로, 정치인들이 공약하는 데로, 사회주의 정책들로 인해, 그 이념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졌고 사회가 더 인간적이 되었다고 착각한다. 
은근히 똑같이 사회주의를 추구해온 지구 상의 대부분 국가들이 자신들처럼 잘 살지 못하는 이유를 사회주의를 추구하기 위한 사회적 도덕의 부재로 돌리는 듯하다. 
이런 은근 인종주의적 착각은 자신들의 국가가 왜 잘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장이 일찍 발달했고 무역에 일찍부터 전념했기 때문이다.
영국인 자신들도 체감적으로 시장과 무역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알고 있다. 
Brexit 내내 토론 때마다 나오는 주의제 중 하나가 EU와의 single market을 어떻게 지속해 나갈 것인가였다. 자신들의 그런 시장과 무역에 사활을 거는 태도 자체가 그들을 먹여 살려왔으며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지고 사회가 더 인간적이 될 수 있었던 근본 조건이라는 사실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liberal socialism의 노동당이든 이념 부재의 Tory 당 (거의 liberal socialism을 배껴쓰는 수준)이든 영국의 정치인들은 잘해야 어떻게 돈을 쓸 지에 대한 공론을 이끌 수 있을 뿐이지 어떻게 돈을 벌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Marx가 자본론을 쓰기 이전에도, classical liberalism이 democracy와 합체하기 이전에도, 영국의 19세기 중반까지의 역사는 무수한 개인 그리고 societies 에 의한 institutional reform, moral reform, 수도 없이 많은 philanthropic 활동, 그리고 개인들의 intellectual and moral aspiration으로 점철되어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은 전 유럽에서 가장 governmental intervention 이 약했던 classical liberalism의 모델이었다. 
이렇게 Marxism이 없던 시절에도, 무역으로 벌어들인 부는 시장을 통해 distribution되고 있었고 시장에서 개인들은 신뢰, 근면, 헌신의 사회적 자산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나중에 찾아와 노동자들에게 구애했던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이념 부재의 보수 정치상품 판매자들도 나름의 집단주의적 전략을 채택하는데, 그 중 하나가  nationalism 이다. 특히 19세기 후반 투표권의 확대로 이 전략은 유럽 우파의 주무기가 되었으며 1차 대전의 주원인을 제공하였다. 

이념 탑재 보수라 할 수 있는 classical liberalism 이념에 기반한 정치 상품은 19세기 후반 이래 정치시장에서 차가운 외면과 조롱을 받아 왔다. 이들은 individualism 에 호소하므로 정치시장에서 큰 목소리를 내는 집단화된 구매자들의 반감과 무시를 초래할 뿐이다. 

미국와 유럽에서 사회주의 좌파 정치상품에 대한 대항마가 대개 한심한 nationalism에 호소하는 똑같이 집단주의적인 우파상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경우는 이들 미국, 유럽과 또 달라서, 사회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탁해왔다. 
20세기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이들 두 집단주의 이념이 공고히 결합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2017년 현재 한국 사회의 mainstream 사회문화 흐름 및 orthodox 정치경제 이념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민족 사회주의이다. 

민족 사회주의는 80년대 후반 이래로 democracy 를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기치로 내걸며, 이념 부재의 보수 정치집단을 대체할 저력을 쌓아왔다. 그리고 이제 형해화한 한국의 보수 영역에서 이 주류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집단은 사실상 존재하지 힘든 실정이다.  

한국의 민족사회주의자들이 목숨처럼 외치는 Democracy란 개념의 본질은, 원래 선거(다수결)의 절차적 의미를 제외하면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데로 (모든 나라가 다 어떤 식으로든 민주주의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대표적인 nominal concept일 뿐이다. 

이들의 사회주의 이념은 대체로 독일 및 북유럽 사회주의를 모델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시장과 무역에 대한 뿌리 깊은 친화성이, 파괴적인 사회주의 정책의 효과를 그나마 상쇄해올 수 있었던 반면, 한국은 군사정부 시절의 경험을 빼면 시장과 무역에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으며 군사정부 몰락의 반작용으로 민족사회주의 정치이념의 반시장 반무역 선동이 한국 사회에 효과적으로 기능해왔다. 그리고 애당초 북유럽식 사회주의가 따로 있고, 남미,남유럽식 사회주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한국의 기회주의적 보수 정치인들은 군사정부 시절 군인들에 결탁하여 정치권력을 누릴 수 있었으므로 이들의 정치 상품은 경쟁력이 전무했다. 
오직 군사정부 시절의 실질 국부 증가를 자신들의 치적인양 가로채기해왔으며, 군사정부 몰락 이후엔 사회주의와 결탁하여 정치권력 유지를 기도해왔다.
무수한 이합집산으로 얼룩진 한국 정당사가 보여주듯, 한국의 정치시장 구매자들은 브랜드 역사도 없는 신뢰가 안가는 정치상품을 계속 구매해야했으며 환불하고자 해도 이미 상품 판매자가 뒤바뀌는 사례를 계속 겪어왔다. 

한국에서 classic liberalism 은 20세기 전반의 일본의 지배(classical liberalism)와 이미지가 겹쳐져, 현재에도 친일파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강한 nationalistic 한국 사회에서 거의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과거 군사정부의 주된 정치 이념은 statism 과 nationalism이었지만, 시장을 적극 개발했던 그들의 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경제 호황을 가져왔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 까지의 영국처럼, 1920년대 일본처럼, 개인과 사회의 도덕 수준이 무럭 무럭 향상되기 시작했다. 물론 개인의 도덕도 statism에 입각해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지도하려들었다는 점은 달랐다. 국민교육헌장은 명문이기는 했지만 사실 불필요했다. 그보다 시장에서 개인들은 자연히 도덕적 심성을 경험으로 익힌다. 반면 교수와 교사에 의한 교육은 사회주의적, 이상주의적 가치로 채워지기 쉽다. 

물론 군사정부도, 이후 이념 부재의 기회주의 보수 정치집단도 왜 그런 경제적 사회적 향상이 가능했는지에 대해 무관심했다. 지도자의 영도력을 부각하려는 일부 보수 집단의 사고는 북한의 그것과 별 차이를 못느끼게 한다. 사회민족주의자들이야 당연히 그들 이념대로 (부자는 빈자를 착취) 온전히 노동자의 희생 때문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결국 한국인들은 classical liberalism에 근거한 경제이론과 자신들의 경제발전 사이에 아무런 연관도 짓지 않는다. 한국 학생들은 Marx는 알아도 Carl Menger는 모르며, Keynes는 알아도 Mises는 알지 못한다. 애초부터 좌파 경제학 외에는 교육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또한 영국과 일본의 경우 (영국은 19세기 후반 socialism에 대항하기 위해 이념부재의 보수당이 nationalism에 매달리게 되면서, 일본은 1930년대 이후 아예 나라 전체가 nationalism에 매달리면서, 공히 파국으로 치달은) 와 달리, 군사정부의 한국은 태생부터 nationalism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승만의 (그 자신은 classical liberalism을 기치로 내걸고 당이름도 그렇게 지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nationalism 과 anti-socialism에 그쳤던) 자유당 시절부터 nationalism은 한국 정치의 생명줄이었다. 

한국의 대중은 집단주의 (socialism 과 nationalism)가 인류역사에 경험론적으로 보여준 우울한 fact들을 전혀 학습하지 못하고 있으며, 2017년 현재 전속력으로 한국의 경제는 sinking 중이다. 한국의 사회민족주의자들은 낙수 효과는 없다고 선언하고 더욱 경제의 사회주의화에 박차를 가할 때라고 선전하고 있다. 낙수효과가 없는 이유에 대한 분석은 기회주의 보수 우파가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따라해온 상황에서 무의미할 것이다. 2000년대 이래로 경제에 있어 한국은 중국보다 사회주의적이었다.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다. 한 때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나머지 나라들은 저만치 한국을 따돌리고 앞서 가고 있다. 싱가폴은 일본보다 일인당 GNP가 높다 (높은 것은 물론 경제 수치만이 아니다). 극일을 하면 친일이고 반일이고 더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사회주의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한국의 경제에서 일자리는 사치에 가까와 지고 있다. 통화 가치나 유지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화장실 휴지를 사기 위해서 수퍼마켓에 길게 줄선 사람끼리 총질까지 하는 (한때 사회주의의 이상을 향해 달렸던) 현재의 베네수엘라의 흔한 풍경은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낯설지 않다. 당오전, 당백전의 발행으로 돈찍어내는 것을 우습게 알았던 19세기 후반의 조선의 풍경이기도 하니까. 

19세기 세계 최빈국에 농민 폭동이 사흘이 멀다 하고 일어나던 조선의 백성이 같은 기간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였던 아시아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 식민지인들에 비해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란 착각은, 영국인들의 19세기 과거 영광의 근본 원인에 대해 집단주의적 착각에 빠져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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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인간의 인식능력 내지 사유능력은 언제나 감정이 사고를 앞선다. 
대중의 정치시장에서의 정치적 구매행위를 결정하는 사고는 대부분 집단주의적 유혹을 견뎌낼 정도로 깊지 못하다. 
그 결과 대부분의 현대 국가의 정치시장의 주류 정치 이념은 좌파는 socialism (혹은 liberal socialism), 우파는 nationalism 에 기울게 되었다.
Nationalism의 폐해는 전쟁과 인종 청소로 더 논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역사 경험으로 시장과 무역의 중요성을 체득하지 못한 국가에서 도입된 사회주의적 정책 역시도 대부분 파괴적인 경제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반대로 classical liberalism은 근대이래로 인류의 역사에서 individual improvement를 위한 노력의 근본 동력이었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흔히 망각되고 정치시장에서는 늘 싸늘한 시선을 받아 왔다. 

특히 한국에서 classical liberalism은 이기주의, 친일, 비인간적 ... 뭐 온갖 stigma가 따라 붙는다.
반면, 최근에 몰락한 기회주의 보수 우파 정치인들은 statism도 classical liberalism도 그 어떤 이념도 부재했던, 단지 과거 군사정부의 경제적 성과를 자신들의 이미지로 포장했던 정치 상품 경쟁력 zero의 집단이었으므로 시장 퇴출은 막기 힘들었다.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억지스러운 극적 연출도 있긴 했지만.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좌파가 socialism 과 nationalism을 다 장악한 막강 이념체로서 (기회주의 보수의 몰락으로) 견제 없이 폭주하기 직전이다. 

여기까지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물론 주관적 견해이며, 논문도 학문적 토론도 아닌 순수한 사견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인류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음에 입각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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